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스페인 전쟁 (문단 편집) == 여담 == * 초전부터 고전한 스페인 해군에 비해 스페인 육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쿠바 전역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산 후안 언덕 요새 전투(San Juan Hill order of battle)[[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San_Juan_Hill|#]]에서는 스페인군 보다 '''10배'''의 수적 우위를 가진 미군이 오히려 사상자는 '''3배'''[* 미군은 8412명이 참가해 12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스페인군은 800명이 참가해 48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나 많이 내고 승리하는 추태를 보여줬는데 이후 벌어진 엘 카네이(Al Caney) 전투와 7월 13일 산티아고 전투에서도 수적 우위에 비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아래에 서술했다시피 양 군의 주력 제식 개인화기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후 미군은 [[크라그-에르겐센]]에서 [[스프링필드 M1903]]로 제식 화기를 교체했다. *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비난하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처음 이 전쟁을 지지했다가 조국도 학살과 식민지배를 되풀이하는 것에 경악했다. 미국도 당시 유럽과 별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는 걸 몸소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 그래서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자에서 미국과 상층부를 격렬하게 깠다가 무려 24년이나 출판금지당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평가받는 당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개인 성향 탓도 컸다.[* 헌데 매킨리는 오히려 재선 선거 운동에서 "에스파냐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던 수많은 식민지인들을 자신이 구했다"고 뻥카를 쳤고 이게 먹혀들어 무난하게 당선되었지만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 * [[황색언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전쟁이다. 당시 미국 저널리즘계에서 신문왕이었던 [[조셉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유명한 경쟁이 한창이었는데 전쟁을 정당화해 언론이 전쟁의 주 원인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전쟁 발발 전부터 강화조약 시점까지 당시 미국에서는 스페인에 대한 과장되거나 완전히 날조된 기사와 사설이 넘쳐났다. 대표적인 사례는 올리벳호 사건으로, 쿠바 여성 클레멘시아 아란고가 반란군 편지를 지니고 있다는 혐의로 미국 국적의 선박 올리벳호에서 수색을 받았는데 여경이 적절한 절차로 행한 수색이었지만 허스트의 언론은 삽화와 기사로 남성 경찰들이 여성을 알몸수색했다는 자극적인 보도로 미국인들을 선동했다. 지방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7개월 동안 LA타임스나 시카고 트리뷴 같은 지방지 독자들도 매일 평균 10개 이상의 쿠바 관련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https://www.nationalgeographic.com/history/magazine/2019/03-04/yellow-journalism-role-spanish-american-war/|#]] * [[이원복]]은 [[가로세로 세계사]]에서 이 전쟁을 대충 벌어진 충돌로 그렸으며 미국이 울면서 필리핀에 돈을 투자하는 그림과 같이 우린 제국주의와 다르다느니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필리핀의 노른자위 땅이나 사업권을 챙겼으며 결코 손해 보는 지배를 하지 않았다. * [[나비효과]]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주의파 군대 지휘관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가문은 원래 대대로 해군 장교로 복무했는데 미서전쟁의 패배로 식민지를 거의 다 상실한 스페인이 해군을 대폭 축소하면서 해군 장교 양성도 중단되어 버렸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프랑코는 [[꿩 대신 닭]]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육군 장교로 [[커리어]]를 이어가게 된 것. 그리고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모로코]]와 [[적도 기니]]뿐이었으며 적도 기니보다 모로코가 훨씬 중요했기에 스페인은 정말 모로코를 사수하는 데 목숨을 걸다시피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로코에 주둔하는 스페인군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 버렸고 그 주둔군 사령관의 입김도 거세지게 되었다. 모로코 주둔 병력의 규모와 질 역시 스페인 군부 내에서 상당히 뛰어났다.[* 이들 스페인 아프리카 군단(Cuerpo de Ejército Marroquí)과 모로코인 외인부대가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군의 주력이 되었다.] 그리고 프랑코가 바로 모로코에 주둔하던 스페인군 사령관 출신이었다. 다만 프랑코의 형은 가문의 전통대로 해군이 되어서 내전 중 동생을 지지했다. *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패전은 스페인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중남미 식민지의 상당수를 [[라틴 아메리카 해방사|잃게 되었는데]] 미국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끝장난 셈.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녔고 가톨릭을 믿는 모국이 벼락출세한 개신교 신생국가에게 처절하게 패한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히 컸고 이로 인해 기존의 체제에 대한 의구심과 반발이 점점 더 커져갔다. 17세기부터 정치적 상황이 혼란했던 스페인은 당시 어린 [[알폰소 13세]]가 모후의 섭정을 받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 되는 혼란스러운 정치-사회적 상황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98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철학적 문학적 사조가 등장하여 전후 스페인 사회에 관한 철저한 재평가와 외상에 대해 분석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뒤집어보면 스페인 인문학의 황금기 시작. * 이 전쟁에서 미군은 [[개틀링 기관총|개틀링]]으로 스페인군을 압도한다. 그러나 개인화기에서는 [[후장식]] [[스프링필드 M1873]]이나 [[크라그-에르겐센]]을 사용하였고[* 미 육군 기준. 미 해병대는 [[리-네이비|M1895 리 네이비]] 소총이 제식이었다.] 이 때문에 스페인군의 개인화기였던 [[마우저 소총#M1893 (스패니쉬 마우저)|M1893 스패니시 마우저]]에 호되게 당하였다. 스트리퍼 클립을 통해 빠르게 장전이 가능하고 5연발 내장식 탄창을 가진 스패니시 마우저에 비해 미군의 크라그-에르겐센 소총은 클립장전이 안 돼 한 발씩 장전해야 했다. 이에 미군은 새로운 개인화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1903년에 마우저계열 소총을 참고하여 [[스프링필드 M1903]]을 개발했다. * 이 전쟁의 연장선상인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미군은 필리핀의 모로족 전사들을 상대로 뜻밖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필리핀의 모로족 전사들은 금속 갑옷인 [[경번갑]]을 입었는데 이 경번갑의 방호력이 굉장히 좋았는지 1899년 필리핀을 침공한 [[미군]]이 모로족과 싸웠을 무렵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https://cafe.daum.net/historywar/Nwp/2615|출처]] 그리고 이 사례는 이후 [[M1911]]를 도입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사례로 인해 미군은 기존의 권총에 쓰인 38 롱 콜트 탄의 위력을 문제삼고 더 강한 탄인 .45 구경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 이 45구경을 사용하는 [[자동권총]]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 자동권총 도입 심사에 출품한 물건 중의 하나가 바로 M1911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M1911 문서 참고. * 이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스페인은 본국이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을 [[괌]]에 알리지 않아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미군의 군함이 산타크루스 요새에 13발의 포격을 가하자 괌의 스페인 고위대표들이 배를 저어서 군함에 승선해 [[예포]]를 후하게 쏘아준 것에 감사해하며 우리도 그 답례를 해주고 싶은데 예포를 꺼내 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리니 양해를 부탁한다고 하였고 이에 난처해하던 미국은 상황을 설명해 주었는데 미국과 스페인은 전쟁 중이고 자기들은 인사가 아닌 전투를 개시하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괌은 두 달 넘게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하다가 적군에 의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군의 포격도 요새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하다 못해 제대로 피해를 줬다면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고 해도 괌 측에서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느냐?'라며 정식 항의할 여지라도 있었는데 그 조차 아니어서 이런 착각이 가능했던 것이다. 저항의지를 상실한 괌은 며칠 후 투항했고 아직까지도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 쿠바를 잃은 스페인의 자본은 국내투자에 집중되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의 경제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 쿠바 전역에서 발생한 미군의 사망자 중 대다수는 전사가 아닌 상한 식량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사망자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것은 쇠고기 통조림이었는데 당시 참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걸 먹느니 차라리 모자를 씹어 먹는 게 더 낫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이 불량 [[통조림]] 생산은 여전해서 [[업튼 싱클레어]]가 육류 업체의 실상을 폭로한 소설인 '정글'이 결정타를 날려서 식품관리법 제정으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